마태복음 19장
열 아홉 번째 계단으로 올라갑니다.
유스도가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1 예수님은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 건너편 유대 지방으로 가셨다.
2 그때 많은 군중이 따르므로 예수님은 거기서도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3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와서 '구실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처음에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5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두 사람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라고 하신 말씀을 읽지 못하였느냐?
6 그렇게 되면 두 몸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이다.'
7 그렇다면 왜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아내와 이혼하라.' 고 했습니까?' 하고 그들이 묻자
8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것은 너희가 고집이 세고 악하기 때문에 아내와 이혼하는 것을 허락한 것이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9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음행한 일도 없는데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하자
11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이 다 이 말대로 할 수는 없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람들만 그렇게 할 수 있다.
12 처음부터 결혼할 수 없는 몸으로 태어난 남자도 있고 불구자가 되어서 결혼할 수 없는 남자도 있으며 하늘 나라를 위해 스스로 결혼을 포기한 사람도 있다. 이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13 그때 사람들이 손을 얹어 축복해 달라고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으나 제자들이 그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아라.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5 그리고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하시고 그 곳을 떠나셨다.
[마태복음 19장 1절-15절]
여기까지 입니다.
살몬이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에 대해서 가르쳐주셨지요.
이 용서는 하나님의 자비의 법안에서 나오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들어있어야 하지요.
남의 허물을 용서하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허물이 반복되지 않도록 축복해주는 것입니다.
서신대로면 지금 예수님은 유대 지방으로 향하십니다.
큰 무리가 따르고 예수님은 이들의 병을 고쳐주셨지요.
하나님의 자비의 법을 행하면서 이동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또 등장했지요.”
너도할례가 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지난번에 사두개인들을 꼬득여서
예수님을 잡아가려고 했었지요.
그런데 실패했습니다.
이들이 다시 머리를 써서 이번에는 헤롯왕에게
넘겨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헤롯 왕의 영지는 갈릴리 지역이지요.
예수님이 주로 활동하시는 곳입니다.
세례 요한을 처리한 방법으로 예수님도 처리하고자
음모를 꾸몄지요.
예수님에게 이혼에 대한 질문을 한 이유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이미 이혼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지요.
누구든지 아내의 불륜이 아닌 다른 이유로 이혼을 하는 사람은
불륜이 죄를 저지르는 것이고 그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도
불륜의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말로 꼬투리를 잡고자 하고 있지요.
그래서 자기들의 스스로 증인이 되고자 물어보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와서
'구실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하고 물었다.
라는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이 지난 번처럼 대답을 하면
헤롯 왕에게 고발을 하고 속을 뒤집어 놓아서
세례요한처럼 잡아들이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만일에 말을 바꾸면,
그걸 가지고 공격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처음에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두 사람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라고 하신 말씀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렇게 되면 두 몸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셨지요.”
그러자 요한이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대답은 그들의 함정을 피하면서
하나님의 자비의 법을 따라서 용서하면서 사는 삶을
가르쳐주셨다는 말이 되나요?”
미리암이 말했습니다.
“그렇게 되겠지요.
이어지는 대화를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목적에만 집중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했지요.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나온 이혼규정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아내와 이혼하라.' 고 했습니까?'
하고 그들이 물었지요.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그것은 너희가 고집이 세고 악하기 때문에
아내와 이혼하는 것을 허락한 것이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음행한 일도 없는데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 라고 하셨지요.
예수님이 하나님이 정의를 해주신 부부관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 말을 듣고 반박을 할 수 없었지요.
성경에 기록된, 그것도 모세가 직접 기록했다는
창세기에 기록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이유를 물어봅니다.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깨버리는 사람이라는 공격을 당했겠지요.
예수님의 답변은 이랬지요.
사람의 고집과 악함 때문이라고 하셨지요.
하나님이 말씀하신 둘이 하나가 되는 부부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자비의 법을 마음에 담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상대를 향한 용서와 자비와 축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법 안에서만 온전하게 나올 수 있지요.
만일에, 처음부터 하나님이 이혼을 하지말라고 명령했다면
이스라엘에 불륜의 죄가 존재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사람들은 어떻해서든지 방법을 찾겠지요.
이것이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이유가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하셨습니다.
모세가 이혼을 허락했을지라도
남자가 아내를 버리는 일은 가장 가까운 내 배우자,
이미 한 몸이 되어야 하는 나의 반쪽에게
하나님의 자비의 법을 행하지 않는 모습이 된다고 말하셨지요.
바리새인들이 헤롯 왕을 충동질해서
예수님을 잡아가게 하려는 의도가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이 헤롯 왕을 지목해서 비방한 것이 아니라
이혼에 대한 성경의 말씀을 말해주셨으니,
이것은 재판거리가 아니라
신학논쟁거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미할례가 말했습니다.
“이 말씀을 말씀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제자분들인것 같군요.
이것이 예수님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말없이 가버렸지요.
그런데 오히려 제자분들이 심각하게 물어보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으로는 아내와 하나가 되고
이혼하지 않는 일이 어렵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요즘에도 우리 유대사회나 이방인 사회나
부부사이에 불화가 많고 이혼하는 일이 흔하지요.
이혼하지 않았어도 이혼한 것처럼 지내는
부부는 더 많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비의 법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하나가 되는 일은 머리로는 가능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다르지요.
머리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손바닥이 마주쳐야 한다고,
둘이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니 이것도 쉽지 않지요.
말씀을 몰라서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행할 마음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다 이 말대로 할 수는 없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람들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처음부터 결혼할 수 없는 몸으로 태어난 남자도 있고
불구자가 되어서 결혼할 수 없는 남자도 있으며
하늘 나라를 위해 스스로 결혼을 포기한 사람도 있다.
이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지금 결혼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결혼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셨지요.
사람이 부부가 하나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뜻입니다.
세상의 처음부터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축복하신 관계입니다.
그러니 혼자 사는 길을 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말씀이 되지요.
예수님은 이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을 향한 명령이 아니라,
하늘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결혼을 포기하려면
하나님의 허락을 받으라는 말씀이 되겠지요.
그러면 이 말씀은 무슨 말이 되기도 할까요?
바로 결혼한 대다수는 서로 하나되기를 힘쓰라는 말씀이 됩니다.
하늘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결혼을 포기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가요?
대다수는 결혼을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혼해서 죄를 짓게되는 상황을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의 법으로 하나가 되라고 축복해주십니다.
부부가 서로 용서한다는 말은 이런 의미가 됩니다.
과거와 현재의 허물을 용서하고,
같은 허물을 반복하지 않게 변화되도록 상대를 축복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앞에 나온(마태복음 18장) 형제 간의 용서의 시작점이 됩니다.”
요한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나옵니다.
제자들은 아이들을 데려온 어른들을 꾸짖었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축복을 하셨지요.
이 일도 용서의 가르침과 연결이 되는 것인가요?”
살몬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보자면, 용서라는 단어는
상대방이 왜 이런 허물을 범했는지를 이해하고
처벌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허물이 반복되지 않도록 축복해주어야 하지요.
그 시작은 부부관계라고 말했지요.
그리고 그 완성은 약한 자들을 받아주고 축복해주는 것이지요.
말씀에 나온 어린아이들이 그 완성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자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시점이지요.
제자들도 신경이 예민하고 민감합니다.
자기들의 상상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지
아니면 예수님 말씀대로 예수님이 돌아가실지 몰라서
신경이 예민합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하는 질문을 들으니
제자들의 상상으로는 예수님이 정말 그 말씀대로
잡혀가실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이럴 때에 아이들이 온 것입니다.
한 명도 아니고 단체로 예수님께 기도를 받고자
어른들이 대려왔지요.
제자들 생각에는 지금이 이럴 상황이 아닙니다.
아이들을 상대하는 일은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정신만 산만하게 만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아이들과 엮이는 일은 도움이 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의 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의 법으로 보면 다르지요.
부부관계를 봐도 그렇습니다.
내 배우자는 나의 자비와 사랑과 축복을 받아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 내 몸입니다.
내가 만나는 약한 자들은
나의 자비와 사랑과 축복을 받아야 하는 이들입니다.
내 발목을 잡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를 복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이들이지요.
예수님은 지금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하는 일을
어디서부터 시작하고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시고 있지요.
그렇게 아이들을 받아주시고 용납해주십니다.
천국은 이런 아이들의 것이라고 하였지요.
하나님에게 도움이 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나올 능력이 없지만
그저 하나님의 자비의 법을 따른 자비를 구하고자,
그 법의 축복을 누리고자 그 모습 그대로 나온 이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용납하시고 축복한다는 진리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손을 올리고 아이들을 축복해주셨지요.”
유스도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입이 근질근질한데 계속 읽어도 될까요?”
사람들이 웃는데 대답도 듣지 않고
유스도가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16 한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선생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떤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17 '어째서 선한 일을 나에게 묻느냐? 선한 분은 한 분밖에 없다. 네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계명을 지켜라.'
18 '어느 계명입니까?'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 증언하지 말아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20 '저는 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아직 저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21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가서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22 그러나 그 청년은 재산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 버렸다.
23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24 내가 다시 말하지만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
25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은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27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무엇을 받겠습니까?' 하고 묻자
28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한다. 새 시대가 되어 내가 나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29 또 나를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누구든지 여러 갑절의 상을 받을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30 그러나 지금 앞서도 나중에 뒤떨어지고 지금은 뒤떨어져도 나중에 앞설 사람이 많을 것이다.'
[마태복음 19장 16절-30절]
여기까지 입니다.”
살몬이 말했습니다.
“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예수님께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말하셨는데, 십계명을 전부 다 말하지 않으셨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말하지 않으셨지요.
십계명에서 사람 사이에 관계된 계명을 지키라고 말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말하셨지요.
이 계명이 행해지려면,
하나님의 자비의 법을 따른 자비와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미리암이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러면 하나님의 자비의 법을
실행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물어보신 것이군요?”
요한이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청년은 자신은 다 지켰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신나서 돌아가지 않았지요.
오히려 예수님에게 아직도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지요.”
너도할례가 말했습니다.
“이 청년이, 뭐 지금 살아있으면 할아버지겠군요.
어쨌거나 이 청년은 율법을 행하기는 했지만
이 모든 행위가 자기 마음에 자리잡은
하나님의 자비의 법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한 자기 노력이 되지요.
청년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한 번도 못듣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앞에서 보신대로, 예수님은 산상 수훈에서 말씀하셨지요.
너희의 의가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서기관)보다 의롭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가르치셨지요.
청년이 하나님의 자비의 법의 적용 대상이 되는
믿음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면
예수님에게 다른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을 믿습니다.
제가 율법을 다 지키고 살았지만 아직도 부족함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법을 온전하게 믿을 수 있는 믿음은
어떻게 가질 수가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해야 맞지요.
하지만 청년의 질문은 달랐습니다.
자신이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행하고 있다는
인증을 예수님에게 받고 싶었던 것이지요.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지요.
그런데 지금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청년은
예수님에게 행위로 구원을 얻을 방법을 구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자기 행위가 완전하다고 말하면서
영생의 자격을 논하는 것이 얼마나 큰 허물입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이 허물을 용납하시고
이 청년이 믿음으로 살 기회를 주시고자 하셨지요.”
이미할례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 그 기회가 되는 것인가요?”
너도할례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네, 이미할례군.
잘 들어보게나.
이 말씀은 이런 뜻이 되지.
“부자 청년, 자네는 하나님의 자비의 법이 마음에 없다네.
이 법을 신뢰하는 믿음이 없지.
하지만 굳이 자네 힘으로 의를 완성하고자 한다면 이렇게 해보게.
자네 소유를 모두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주게나.
이것은 자네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자비의 행위일세.
그러면 하늘에서 복을 주실 것이야.
그리고 나를 따르게.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자네 힘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가 되네.
이렇게라도 해볼텐가?”
이런 말이 되는 것이라네.”
요한이 말했습니다.
“아하, 그래서 부자 청년이 근심하고 돌아갔군요.
사람의 마음의 법으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자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의 법을 자기 마음이 법으로 가지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이웃을 향한 진정한 자비와 용서가 나오고,
여기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려는 마음과 행위가 나오기 때문이지요.
부자 청년이 깨어서 기도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주목하지 않으면
끝까지 이해할 수 없고 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청년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주목하고
하나님의 깨달음을 구하는 기도를 한다면
그 계시 속에서 예수님의 의도를 알 수 있겠지요.”
에스더가 말했습니다.
“제자분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고,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하셨지요.
이 말씀은 이렇지요.
부자들이 부자가 된 것은 다 이유가 있겠습니다.
자기들의 해석으로는 자기 마음의 법이 되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자비의 법을 받아들이려면
자기가 믿고 살았던 내 마음의 법을 포기해야 합니다.
자신의 부를 쌓게 만들어주었다고 믿고 살았던
내 마음의 법을 갑자기 하나님의 자비의 법으로
대체해야 한다면 쉽게 할 수가 없지요.
이것은 나를 부자로 만든 삶의 방식을 포기하는,
마치, 죽음과 같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때때로 율법을 따라서
자선행위를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합니다.
전에 야고보 사도님도 말했지요.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법정까지 끌고가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부자가 아닌가요?’
선지자님들이 지적한 죄도 비슷합니다.
‘부자들이 사랑과 자비를 베풀지 않고
일꾼들에게 줄 급여를 속이고, 착취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죄 중에 하나다.’
사실 자기의 부로 많은 선행을 하는 부자들도 있습니다.
많은 자선을 베풀지요.
하지만 막상 자신에게 허물을 범하는 사람이 나오면
끝까지 따지고 책임을 물고 용서하지 않는 이들도
그들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지만,
제자분들은 오해하고 있지요.
하나님의 자비의 법에 집중하지 않고
자기들 마음의 법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몬이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제자분들이 오해하고 있지요.
‘부자가 천국에 가려면 재산을 다 팔아야 한다구?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구?
그리고 나서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구나.
나는 부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런데 나도 집이 두채가 있는데, 이것도 팔아야 하나?
부자가 아니라도 이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했지요.
“아니 그러면 누가 천국에 들어간답니까?
누구나 다 가진 소유가 조금씩은 있는데,
우리도 모두 말씀하신대로 자기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다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까?”
이 말을 합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로 가르침을 주십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가능합니다.”
이 말씀이 이런 뜻이 됩니다.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의 자비의 법을 완성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힘으로는 가능하지요.
행위로 구원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비의 법이 내 마음의 법이 되도록
만드는 일에 집중하세요.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자비의 법대로 용서하고 축복해주시는 일을
집행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침을 주시고 있지요.”
요한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님이 다시 물었지요.
‘저희 제자들은 다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법을 내 마음의 법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 어떤 복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무슨 의미인가요?”
너도할례가 말했습니다.
“이 너도할례가 설명해 드리지요.
먼저 예수님의 대답을 볼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라고 하십니다.
먼저 세상이 새롭게 되는 날이 온다고 하셨지요.
예수님의 재림의 때인데,
제자들은 아마도 조만간 건국될 것 같은
새로운 다윗 왕국으로 착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도,
예수님의 재림의 때이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시점으로 착각했을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자비의 법을 마음의 법으로 만든 제자들은
이 하나님의 자비의 법을 완벽하게 알고 실행하는 자들이기에
나와 함께 보좌에 앉아서 하나님의 자비의 법을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집행할 것이라고 말해주셨지요.
그리고 그 법대로 살았던 열 두 지파,
즉 자신의 형제들을, 하나님을 대표해서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고 축복해주는 일을 행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앞에 나왔던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는 일을
왕의 위치에서 집행하는 축복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지금 시점에서는
그저 예수 황제 밑에 왕들이 되어서 권력을 행사하는
착각을 했겠지요.
제자들이 이런 복을 받은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완성하실 하나님의 자비의 법을
처음부터 보고 배우고 행하도록 선택을 받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계시를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 이 본질을 깨닫지 못했으니
한동안은 그저 몇날이 되지 않아서
왕들이 될 뜬구름이나 잡겠군요.”
요한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어지는 축복은,
제자분들과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또 제자분들이 선포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따를 이들을
위한 축복이 되는 것이군요.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이 말씀이 됩니다.
제가 한 번 의미를 풀어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내 마음의 법으로 만들었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자비의 법으로
다시 만들어가는 축복입니다.
이전에 내 마음의 법을 따라서 내가 가진 집,
내가 만들어갔던 형제관계,
자매 관계, 부모 관계, 자식 관계,
그리고 내 마음의 법을 따라서 내가 만든 부,
이 모든 것을 만든 내 마음의 법을 버린 사람이지요.
이런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자비의 법으로 채워지는 날에는
내 모든 인간관계가 풍성해지고, 그 부도 풍성해질 것을 말해주십니다.
그런데 이 여러 배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겠습니다.
형제가 배로, 자매가 배로, 부모가 배로,
자식이 여러배로 늘어난다는 말도 되겠지요.
집이 여러배로 늘고 땅도 여러배로 늘어난다는 말이 되기도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이것입니다.
가족 관계의 깊이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사랑과 자비로 풍성해 질 것이라는 축복이겠지요.
집에 대한 나의 개념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사랑과 자비로 채워지는 삶입니다.
같은 땅인데 이 땅을 보는 나의 관점이
이전과는 다른 사랑과 자비로 바라보는 삶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의 법을 따라서
생명이 채워지고 풍성해지는 일이 따르지요.
그리고 그 최종 모습은 영생이라고 하셨습니다.”
너도할례가 말했습니다.
“요한 군이 설명을 잘 해주었소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또 말하셨지요.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보다 먼저 하나님의 자비의 법을 가지려고
결단하고 움직인 사람이라도
이 일에 끝까지 집중하지 않으면
나중에 결단하고 움직인 사람보다
뒤로 간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을 향한 말씀이고
우리를 향한 말씀이지요.
남보다 앞서 나가네 뒤에 있네
남을 보면서 비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의 목표는 제자들끼리의 경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스승과 같이 되는 것임을 잊지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오직 스승만을 보라는 말씀이 되지요.
자기들끼리 비교하면서 자랑하지 말라고 하시지요.
제자들이 아직 예수님의 가르침의 본질을
완전히 보지 못하는 상황을 아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역시 예수님은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의 법을 행하시면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이 법이 채워지고
실행될 수 있도록 돕는 일에만 집중하십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만을 실행하시는군요.”
살몬이 말했습니다.
“자 이에 이어서 읽어볼까요?”
유스도가 말했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제가 조금만 더 읽게 해주십시오.
제 소원입니다.”
사람들이 웃는데, 살몬이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계속 큰 소리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자 유스도가 신이 나서는
소리를 지르면서 앞으로 나왔습니다.
-마태복음 19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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